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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나라에서」 “... 할머니는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가 영 딴 세상 사람이 됐다고 했다. 내가 만화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밥은 먹을 수 있는 거냐, 물었고 내가 그렇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헤아리는 건 아버지에게 이혼 이후는 비슷비슷한 죄책감으로 연속된 날들이었으리라는 것이었다. 더 나빠진 오늘도 없었고 더 좋아질 내일도 없었다.” (p.24) ‘더 나빠진 오늘도 없었고 더 좋아질 내일도 없었다’라는 문장을 덥석 문 채로 소설에 끌려간다. 그 바늘을 털어버릴 수도 있고 끝까지 물고 있다 포획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궁리를 하는데 제격인 장소는 일본의 나라에 있다는 사슴 공원일 수도 있고, 내가 M과 마주치게 되는 까페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까페는 오늘 같고, 사슴 공원은 내일 같은데, 곧 사슴 공원이 오늘이 되어버리니 내일은 어디인가 싶기도 하다. 「너의 도큐먼트」 “내가 아버지를 만나리라 기대했던 곳은 약수터일까, 항구일까, 역 광장일까, 차이나타운일까. 아버지를 잡아당겨 채우려는 것은 내 도큐먼트일까, 아버지의 도큐먼트일까. 나는 어느 쪽에도 자신이 없어 지도를 접어 다시 가방에 넣어두었다.” (p.52) 사업에 실패하고 모습을 감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찾아 그 도시의 이곳저곳을 헤매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와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친구 여미를 찾아다니는 내가 남기는 족적이 곧 도큐먼트일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어떤 컴퓨터 화면의 어떤 도큐먼트는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0바이트의 크기에 열리지 않기도 하는데...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지... 김의 말은 내 뺨을 한 대 올려붙이듯 지나갔다. 말투는 따뜻할 것도 차가울 것도 없었지만 센티멘털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무심하게 붙은 듯한 ‘하루 이틀’에도 가시 같은 것이 있었다. 그간의 날들과 결별은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도 크게 좋아질 건 없을 거라는 닮고닳은 냉소였다. 나는 연민에서 센티멘털까지 말의 온도 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p.80) 나의 엄마인 홍과 홍과 결혼한 나이가 아홉 살 어린 김, 홍의 엄마인 나의 외할아버지와 홍의 다세대 주택에 세 들어 사는 인물들, 그리고 내가 재수를 하면서 만난 남자인 표와 학원을 같이 다녔던 마 등등... 내가 처한 일종의 위기 상황은 그저 센티멘털이든 연민이든 무엇으로 퉁 치고 넘어갈만한 것은 아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 “... 시간은 너무 늦고 동네에는 이제 사람들이 살지 않아서 그녀 곁에는 밤밖에 없다...” (p.102) 사람들이 차례차례 떠나면서 그렇게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차곡차곡 정적이 쌓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 나간 자리에 여태 남아 있는 그녀의 곁에 ‘밤밖에 없다’는 말이 남은 것이다. 「아이들」 “... 영주의 전화를 받고 서울까지 간 건 쉽게 돈 벌 수 있다는 일도 일이지만 사춘기를 통과하면서 느꼈던 어떤 패배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우리가 유년을 함께 한 아이들이라는 것, 그 황량한 공사장에서 고립된 외계인처럼 슬픔을 나눴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런 유년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영주와 대현이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했다.” (p.124) 어린 시절의 어떤 시간들을 공유했던 ‘아이들’은 어떤 연유로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가 아예 헤어지게 되기도 할 것이다. 「차이니스 위스퍼」 “기티, 블래키, 스위티, 짓무름, 파랑, 기억, 반원, 욜······ ... 어떤 단어를 불러도 고양이는 오지 않았습니다.” (P.162) 제임슨 부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집과 그 집의 고양이를 돌보고 있는 나는 그러나 그 고양이의 이름은 모른다. 매일 제임슨 부인과 통화를 하면서 고양이를 잘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지만 정작 그 고양이의 이름을 물어보지는 않는다. 「우리 집에 왜 왔니」 “며칠 전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다가 언니 자동차를 발견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좌측 지시등을 켰다가 다시 비상등을 넣고, 마침내 우측 지시등을 반짝이면서 언니는 도로로 합류했다. 언니와 달리 서울에서 내 시간은 허니문 카보다 더 느릿느릿 흘러갔다...” (pp.186~187) 외숙모를 잃고 외삼촌과 그 딸은 인도를 여행 중이다. 그리고 나는 외삼촌의 집에 머문다. 그 아파트에서 동향의 언니라는 인물과 만나고 친해진다 아니 만나고 친해져서 언니라고 부르게 된다. 어학 학원에서는 미니어처를 만드는 유부남 M을 만난다 아니 만났다.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 돼지 껍데기에서 해장국, 냉면, 그리고 활어회까지, 아버지는 망망대해 자영업의 세계를 표랑하는 모험자였다. 출렁출렁 파도를 타며 망루에 올라 우현으로 틀어라, 하면 엄마는 은행과 일수의 힘을 빌려 있는 힘껏 키를 돌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약속한 신대륙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뱃전을 데굴데굴 구르며 풍랑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p.190) 첫 문단에 등장하는 문장이 유머러스하고 유려하다. 물 수제비라도 뜨듯 소설의 초반부를 통통 치고 나아간다고나 할까. 「릴리」 “낮 동안 나는 어느 때보다 바쁘게 일했다.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가 야근을 할까봐, 걔 몫끼지 맡아서 했다. 우리 돈에 맞는 방을 찾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전부인데 그것과 맞바꿀 방들은 신통치 않았다. 그 낙차가 우리를 좀 우울하게 만들었는데 어쩌면 그건 반지하 사무실의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p.229) 나의 룸메이트인 계아는 항우울제인 릴리를 복용한다. 계아는 열심히 돈을 모아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날 작정이다. 우리가 사는 아랫집에는 집 주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데, 온전치는 않아 보인다. 나는 어느 날 주인집의 어느 방으로 연결되는 다락문이 책장 아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북(舍北)」 “... 그는 여자의 마지막 얼굴이 드라큘라 백작과 같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책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평화로운 얼굴이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은하수를 등지고 선 돌들을 둘러보았다. 눈코입이 모두 지워져 표정을 알 수 없는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얼굴이었다.” (p.260) 탄광이 빠져 나간 자리에 들어선 카지노가 있는 어느 고장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그곳에는 많은 것을 탕진한 이들이 있고, 그러한 탕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것마저 탕진하는 자들이 있고, 그러한 탕진을 바라보면서도 그 탕진의 고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김금희 /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 창비 / 279쪽 / 2014, 2018 (2014)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꾸준하고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이어온 김금희의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이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5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차분히 가다듬어온 열편의 소설이 묶였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공간을 찾아나가는 우리 시대 젊은 세대의 초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가운데, 주변을 돌아보는 속 깊고 섬세한 시선이 풍성한 이야기의 결 안에서 따뜻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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