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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오다

fauv 2024. 1. 26. 03:58


삼십 대를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심신을 달래주었던 유일한 책이 여행 산문집이었다. 모든 화살이 나한테 몰려오고 있는 듯한 느낌에 숨쉬기조차 힘들 때 여행 에세이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 주었다. 언젠가는 그들이 지나온 자리에서 나도 그곳의 채취와 풍경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말이다. 참 오랜만에 읽은 여행 산문집이다. 다큐 PD라는 직업보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을 읽은 기억 때문에 작가와의 거리감은 좁힐 수 있었다. [멀고도 가까운]도 여행 중에 읽은 책이다. 그 뒤로 다시 한 번 더 읽어야지 했던 책이기도 한데 [건너오다]를 읽으면서 더 곱씹으며 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나는 길치에 방향치에 인생치다. 그래서 늘 한발 늦게 시작하고 한치 늦게 깨닫는다. 그렇다고 뭐 딱히 크게 손해 본 건 없는 듯하지만 후회되는 순간도 더러 있다.(원래 잘 후회하지는 않는다.) 대학생활은 내게 있어 너무나 급작스럽게 변한 환경이었다. 거주지가 바뀐 것부터 두려움이었으니 세상으로 나갈 용기도 없었다. 부모님도 그런 나를 챙겨 줄 형편이 안되었었고 정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이었다. 그때 텅텅 빈 영혼을 글로라도 채웠었더라면 삼십 대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가 베케트의 무덤 앞에서 많이 울었다던 장면을 보며 들었던 감정이다. 나는 왜 그때 아무것도 붙잡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저자는 직업상의 일이었지만 여행지에서 느꼈던 모든 순간을 생각으로 채워 넣는다. 낯선 풍경뿐 아니라 일상의 순간,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은 그가 늘 품었던 생각들을 줄줄이 엮어 낼 수 있게 해 준다. 여행지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을 자랑삼아 늘어놓기만 했다면 결코 특별할 것 없는 산문집이었을 것이다. 경험이 주는 특별함을 정신이 온전히 받아들일 때 여행은 더욱 특별해진다. 동경하던 작가의 흔적을 발견하고 상상하던 그곳을 직접 눈으로 보는 일, 여행지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연들과 낯선 경험들. 이 모든 것들은 떠나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수확이다. 게다가 극한의 체험들은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게도 하고 경계에선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저자의 말처럼 경계를 넓히는 일은 피곤함과 두려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내면은 더 꽉 차게 된다. 항공사의 실수로 수하물이 늦어진 며칠을 그냥 그렇게 보내며 얻은 깨달음이나 밤하늘의 별처럼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것들 때문에 변화하는 것의 두려움 따위는 떨쳐버릴 수 있다는 것들처럼. 그리고 힘겨운 촬영 뒤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때의 행복감 같은 것들 말이다.유독 기억에 남았던 일화 중 일본 오키야마의 침팬지의 쓸쓸한 멍 때리기가 떠올랐다. 수놈끼리의 경쟁에서 패배한 놈은 가끔 먼 곳을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 위로라는 개념은 없다. 그런 그들에게 연구원들은 he와 she를 붙여서 부른다. 저자는 그 모습을 보며 그들과 인간이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된다고 반기를 든다. 제아무리 인간 사회가 승자만을 기억하는 사회로 전락한다지만 아직은 패자를 향한 너그러운 시선과 응원의 시선이 남아 있어야 함을 말한다. 먼 곳을 바라보는 침팬지와 이십 대의 내가 동일하게 느껴져서일까. 왠지 울컥하고 뭉클했다.태국 치앙마이의 눈먼 아이 이야기에서는 저자가 내린 교육의 정의가 참 와닿았다. 교육이란 그렇게 서로 다른 개인의 언어들이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정일 것이다.-p.158라는 말에서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란 소제목을 자꾸만 곱씹어 보았다. 함께 느낄 수 없더라도 계속 공감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그 결과가 냉소적이 되거나 겸손해지든지 간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은 피해야 하겠다.여전히 미혼에다 여행을 즐기는 절친이 부러운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건너오고 나니 내가 보인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존 버거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는데도 어쩌면 내 생각과 문장은 당분간 제자리걸음이겠지만 심적으로 허우적대지는 않을 여유는 생겼다. 그래서 내면의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이 좋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이렇게 와닿을 줄이야. 크흐~~타인에게 자랑할만한 낯설고 특별한 경험들은 없지만 매일을 새롭게 살아갈 마음만은 단단해지고 있다. 삶은 단정 짓거나 확신하기에 변수가 너무나 많다. 싫고 좋음, 옳고 그름, 예쁘고 못생김, 잘 살고 못 살고,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 착하고 못된... 양분된 속성 속에도 다양한 감정과 의미들이 공존한다. 그래서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냥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면 내려놓게 되기도 하니까.
EBS [다큐프라임] [지식채널e] 연출가이자
존 버거, 리베카 솔닛의 번역가 김현우,

17개국 38개 도시의 ‘경계’를 건너고 ‘틈’을 여행하며
그가 통과한 실감의 세계!

다큐 피디와 번역가, 뜯어보면 묘하게 닮은 직업이다. 전자는 시공간을 한껏 확장시켜볼 수 있는 데 반해 후자는 텍스트라는 응축된 공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비슷하다. 바로 ‘읽어내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전자는 세상사·인간사의 틈을 섬세하게 관찰해 영상으로 담고, 후자는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행간에 배어 있는 미묘한 차이까지 길어낸다. 지성과 감수성, 관찰력과 판단력을 고루 요하는 일이다.

여기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직업으로 삼은 이가 있다.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 ‘화석’을 소재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생명체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되짚어본 [생명 40억 년의 비밀](방송통신심의위원회 2011년 11월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 인간의 성장은 끝이 없다’라는 주제 아래 내레이션 없이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인터뷰만으로 채운 [성장통]과, 아픈 속살을 드러낸 학교를 찾아가 현장의 치열한 고민을 담아낸 [학교의 고백](제25회 한국PD대상 TV작품상 교양정보 부문 수상)은 모두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이다. 공통점은 연출가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존 버거의 행운아 A가 X에게 사진의 이해 ,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 등 섬세하고 이지적인 작가들의 번역가 또한 같은 사람이다. EBS 피디이자 번역가 김현우.

건너오다 는 김현우 피디가 다큐멘터리 기획 및 촬영을 위해, 그리고 그 사이사이 여행다운 여행을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기록한 글을 모았다. 많은 출장지 가운데 17개국 38개 도시를 추렸으며, 프랑스 파리나 영국 런던처럼 익숙한 곳부터 미국의 로렌스, 앤아버, 미줄라와 호주 마운트아이자, 필리핀 아닐라오 등 다소 낯선 곳까지 포함되었다. 그가 십 년 넘게 꾸준히 번역해온 작가 ‘존 버거가 살고 있는 오트사부아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기억되는 프랑스 안시와, 가장 최근 연출작 [김연수의 열하일기]의 배경이 된 중국의 변문진과 진황도 등의 기록도 담겼다.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이름들이다. 저자는 이 익숙하고도 낯선 곳들에서 삶과 사람, 세상의 다양한 ‘경계’를 건너고 ‘틈’을 여행하며, 그것에 대해 읽거나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감’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풍경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프랑스 파리_그 밑에 계신 겁니까?
프랑스 안시_이것만 있으면 된다
러시아 모스크바_마음은 언제 현실을 따라잡는가
호주 마운트아이자_때론 현실이 아닌 것처럼
호주 태즈메이니아_세상의 끝, 혹은 다른 세상의 시작
프랑스 칸_위대하지 않은 자전거 여행

//계속 움직이는 순간
미국_비어 있는 시간들
미국 로렌스1_또래의 유학생 부부와 바비큐
미국 로렌스2_KU 잔디밭과 망가져버린 글라이더
미국 로렌스3_더스티 북셸프의 고양이와 캔자스 주에만 있는 햄버거
미국 앤아버_신호등은 잘못이 없다
미국 왈츠_열두 시간 동안 똑같은 풍경일 거예요
미국 볼티모어_짜기만 했는데 어쩌다보니 다 먹고야 말았던 게 요리
미국 뉴욕_메이저리그를 직관하다
미국 뉴헤이븐_You should be!
미국 미줄라_펄리시티라는 이름
미국 로스앤젤레스_비어 있는 시간
영국 런던_그때는 그랬다
이탈리아 피렌체_선물 같은 밤
필리핀 아닐라오_상상하기 때문에 두렵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_하늘엔 원래 별이 많다
일본 오카야마_자주 먼 곳을 보는 침팬지
발칸반도_세 창문 모두 닫혀 있었다
태국 치앙마이_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것
일본 오키나와_고쿠바 난코라는 이름
중국 마카오_그 바람들은 다 이루어졌을까?
미국 샌프란시스코_나는 내가 한 선택들의 합이다

//기억은 일부러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남지 않는다
일본 규슈_버려졌던 공간과 시간
독일 라이프치히_사람의 몸은 접촉을 필요로 한다
일본 도쿄_뿔 난 삼엽충이 될 것인가, 몸집을 줄인 삼엽충이 될 것인가
일본 오사카_어떤 직선은 슬프다
중국 단동_경계를 사는 사람들
중국 변문진_장백산 담배 한 개비로 건너는 경계
중국 진황도_경계를 건널 때 지니는 것
네덜란드 암스테르담_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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